자연이 ‘놀 터’인 마을 공동체

2015년 9월 23일 | 미분류

한새봉 논두레 | 맑은샘

http://cafe.naver.com/gaegulgaegul/257

한새봉 논두레의 2년을 저의 시각으로 끄적여보았습니다.

 

 

 

 

                자연이 ‘놀 터’인 마을공동체

“물과 흙의 연결·순환 고리를 잇다”

 

 

 

“영어를 못하는 아이가 없는 세상.”

“공부 시작하려고만 하면 엄만 꼭 ‘공부 안 해!’라고만 해.”

“대기업의 입맛에 맞는 인재를 키우는 대학.”

 

출근길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광고 카피. 사람들이 어떤 흐름 속에 살고 있는지 카피 속에 녹아들어 있다. 이 흐름 말고 다른 흐름을 타면 어떨까. ‘엄마가 “놀자”라고 하는 가정’이 늘어나 ‘놀지 못하는 아이’가 없는 세상.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인생관이 ‘나’를 살아가는 인생관으로 대체된 사회.

 

오래된(7년 전) 이야기지만 조한혜정 교수는 이런 흐름을 타는 인간을 ‘놀이하는 몸’이라 표현하며 “이들은 스스로 소생하면서 사회를 소생시킨다”고 했다(2004년 경향신문 조한혜정 칼럼 ‘노동하는 몸, 놀이하는 몸’). 그 지향점엔 ‘돌봄 사회’ 즉 ‘마을’이 있다.

 

광주 북구 일곡동에 ‘놀이하는 몸’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한새봉과 한새봉이 품은 논습지에서 ‘돌봄 사회’를 소생시켜 가고 있다.

 

▲ 광주 앞산뒷산 생태지도

 

 

한새봉 자락 400년

“그 많던 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새봉은 무등산을 모산으로 군왕봉을 이어 삼각산에서 흘러나온 산줄기다. 이 줄기가 흘러흘러 매곡산(여물봉)과 장구봉, 운암산으로 이어진다. 이들 산줄기는 광주에서 북쪽을 향해 뻗으며 북구 지역의 허파 역할을 하고 있다.

 

1600년대 광산 노씨와 광산 이씨가 이곳에 함께 마을을 이루기 시작했고, 이곳을 우리말로 큰 마을을 뜻하는 ‘한실’(현재는 일곡동)이라고 불렀다. 그 시대 마을사람들은 마을 뒷산을 소가 누워있는 형상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다시 남쪽으로 휘돌아 흘러내려가는 산을 그 소의 여물(현재 매곡산-여물봉)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마을 뒷산은 ‘황소봉(황쇠봉)’이라 불리었다.

 

소를 의미했던 마을뒷산은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산이 품은 물을 마을 곳곳에 뿜어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샘들을 ‘개시암’, ‘말시암’, ‘구시시암’, ‘조개시암’이라 불렀다. 이렇게 한새봉은 사람들을 보듬어 품었고, 현재 10,780세대(2009년 통계)가 그 품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자연의 흐름에 맞춘 생애주기를 가져가며 농사를 중심으로 확장해 왔던 일곡마을엔 1996년 택지개발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조성된다. 황소봉 밑까지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뒤덮이며 흙과 물의 연결·순환 고리는 희미해졌고 샘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졌다. 황소봉의 여물이었던 매곡산의 여물봉도 이곳을 관통하는 도로(본촌산단 넘어가는 길)가 생기며 소의 이야기도 사라졌다. 그러면서 ‘황소봉’은 ‘한새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 한새봉의 되새김질로 뿜어나는 물이 유일하게 솟아날 수 있는 곳이 될지도 모르는 한새봉 개구리논.

 

이제 남은 곳은 한새봉 자락 뽀짝 붙어있는 산지습지 뿐. 앞으로 한새봉의 되새김질로 뿜어나는 물이 유일하게 솟아날 수 있는 곳이 될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습지에서 논농사가 이뤄졌다. 노현채(75세)어르신이 최근(2008년)까지 힘들게 벼농사를 지어왔다. 젊었을 때야 거뜬하게 할 수 있었던 800여 평 농사는 나이가 들어가며 힘에 부쳤다. 더욱이 함께 농사를 지었던 이들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땅을 놓아두고 떠나 일을 거들 사람이 없어졌다.

 

사람들이 함께 모심기를 하고, 함께 논두렁 풀을 베고 함께 피를 뽑고 함께 메뚜기를 잡고 함께 벼를 벴던 것이, 혼자 기계로 모를 심게 되고 혼자 약을 뿌리면서 논두렁의 풀과 피를 죽이고 메뚜기도 죽이는 상황이 되었다. 그렇게 벼만을 키워내며 혼자 기계로 벼를 베게 되었다. 어르신도 더 이상 벼농사를 짓지 못할 것 같았다.

 

이를 알고 몇몇 동네 주민들이 함께할 사람들을 모았다. 이들은 2009년부터 할아버지를 도와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를 도와줄 사람이 생기니 기계도 농약도 필요 없게 되었다. 숨어있던 개구리, 도롱뇽, 잠자리, 소금쟁이, 우렁이, 물방개 등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올챙이를 잡아먹는 원앙도 날아들었다.

 

 

농(農), 마을을 소생시키다

 

“나 어렸을 때 울 오빠가 개구리 잡아서 뒷다리 구워주고 그랬는데 맛있었어.”

“메뚜기도 잡아서 구워 먹었지.”

“비오는 날엔 논에 들어가면 미꾸라지 천지였어. 맨발로 들어가면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데 느낌은 이상했지만……. 잡아다 추어탕도 끓여먹었지.”

“그렇게 놀다가 샘에 씻으러 가면 꼭 애들 옷 홀라당 벗겨놓고 씻기는 동네 아짐들이 있었어.”

 

▲ ‘한새봉 개구리논’ 공동경작에 참여해 손모심기를 하고 있는 일곡동 주민들.

 

함께 경작에 참여한 주민들이 기억들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이야기들이다. 다행이 개구리와 도롱뇽이 생겨났다. 주민들은 이들 양서·파충류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논습지의 이름을 ‘개구리논’이라 지었다. 한새봉 논습지에 사는 생물들 중 하나인 개구리를 대표로 내세워 이들의 생애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민들은 ‘한새봉 논두레’를 구성했다. 공동으로 무농약, 저석유로 벼농사를 지었다. 이에 따른 논 생태계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논생물 조사를 했다. ‘개구리교실’을 열어 학교가 끝난 아이들이 ‘개구리논’에서 다양한 생물들과 눈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또 마을 잔치를 열어 더 많은 동네 주민들에게도 ‘한새봉의 되새김질’의 의미를 알려냈다.

 

이렇게 2년간 ‘개구리논’에서 벼농사를 직접 체험하며 ‘놀이하는 몸’을 만들어왔던 주민들은 자연과 함께 했던 동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었다.

 

“흙이 발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느낌. 어른인 저한테도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도시에서 쉽게 이런 흙의 느낌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죠. 아이들도 이런 느낌을 느끼고 소중히 간직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양귀순(여. 북구 일곡동 진로A)

 

“주말이면 가족과 교외로 자주 나갑니다. 그 때마다 들에서 모가 자라서 벼가 되는 풍경을 눈으로만 봤는데요. 그러다가 직접 손으로 모를 심고 거름도 주며 키워낸 개구리논의 모습을 봤을 때 행복했어요.” /전경아(여. 북구 삼각동 삼각A)

 

“힘을 모아 유기농으로 벼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논습지에 사는 다른 생물들도 살아났구요. 이렇게 거둬들인 쌀이라 안심하고 먹게 됩니다. 더불어 자연도 건강해졌으니 뿌듯합니다.” /김승원(여. 북구 일곡동 한일A)

 

“아들 형준이 같은 경우엔 논에서 체험했던 것들에 대해 질문을 많이 해요. ‘피하고 벼하고 어떻게 달라요?’, ‘왜 기계로 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모를 심고 벼를 베요? 그러면 더 좋아요?’ 등등. 처음엔 단순히 벼농사를 짓는 것이었지만 아들의 질문을 통해 기후변화시대에 논습지의 중요성도 배우게 되었어요.” /김숙정(여. 북구 일곡동 롯데A)

 

“우리 동네에도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게 좋습니다. 공동으로 일을 하고 또 식사도 같이하는 모임이 도시에서 흔하지 않잖아요. 이 모임이 지속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성자(여. 북구 삼각동)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다

 

“우리가 어릴 적에는 온 동네가 놀이터였고 집 앞을 나가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신나게 노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놀 수 있는 틈은 물론 터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학원과 공부에 치여 놀이를 빼앗긴 아이들은 집에 와서도 책상에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슬픈 일입니다.” /강소영(여. 북구 일곡동 한일A)

 

▲ 잠자리 채를 들고 개구리논으로 향하는 아이들.

 

‘개구리논’에서 아이들이 봄에는 ‘삐비’(띠-벼과 식물)를 따먹고 뱀딸기의 물 같은 맛을 느낀다. 여름과 가을에는 방아깨비가 방아를 찧는 모습을 보고 잠자리 날개의 미세한 떨림을 본다. 겨울엔 하얗게 눈부신 눈 위에서 썰매를 탄다. 아이들에게 한새봉과 개구리논은 훌륭한 자연놀이터다.

 

“그 옛날 동네에서 언니, 오빠, 동생들과 재밌게 즐겼던 놀이들을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싶다.”며 엄마들이 아이들과 함께 했다. 키가 크고 싶어서 자꾸만 뛰는 아이들은 개구리 같았다. 그렇게 아이들은 개구리와 잘 어울렸다. 이런 아이들이 모였으니 ‘개구리교실’이 되었다. 엄마들은 서로 돌아가며 아이들이 재밌게 뛰어놀 수 있게 도움이 역할을 자처했다. 함께 산책을 하기도 하고 공도 차고 곤충들을 잡아 관찰하고 간식도 함께 만들어 먹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노는 개구리교실을 마음에 들어 한다.

 

상윤(9세. 일신초)이는 “개구리교실 마음에 들어요. 아주 시끄러워서 마음에 들어요. 저는 시끄러운 것을 좋아해요”라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이 많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며 시끄러운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시끌벅적한 개구쟁이만은 아니다. 숲과 논의 생명들과 관계 맺으며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사랑할 줄도 알게 됐다. 지난 여름, 아이들은 논에서 개구리가 돼 가는 올챙이를 보겠다고 잡아다 욕조에 키우며 관찰했다. 아이들은 따가운 햇살에 메말라가는 도랑에 갇힌 올챙이를 구해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잡았던 올챙이를 다시 논에 풀어 준 것이다.

 

▲ 메말라가는 도랑에서 올챙이를 구해 논에 놓아주고 있는 아이들.

 

하루를 보내며 쓰는 그림일기에 건규(9세. 일신초)는 “올챙아 미안해 이젠 괴롭히지 않을게. 괴롭힘 받지 않게 힘 센 개구리로 자라렴”이라고 썼다.

 

 

‘개구리논’, ‘한새봉’의 되새김질과 함께 소생하다

 

농경사회에서는 훌륭한 일꾼인 소를 집터에 들이고 함께 살았다(불과 30여 년 전이다). 소는 함께 일하는 가족이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생명의 물을 뿜어내주는 일곡마을의 뒷산을 ‘황소봉’이라 이름 짓고 늘 함께 하고픈 마음을 전했는지도 모르겠다. 1만여 명이 모여 사는 사람만의 공간으로 인식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도시산업사회가 진행되면서 일꾼인 소는 기계로 대체되며 전적으로 인간의 먹을거리로 전락했다. 자연스레 뒷산도 그 의미가 달라졌고 산은 깎이고 도로가 생겨났다. 푸르고 황토 빛깔이었던 세상은 온통 회색으로 바뀌었다.

 

400여 년 전 이곳에 마을이 형성됐던 이유는 한새봉이 품은 물이 마을 곳곳에서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마실 수 있는 물이 솟아나고 있었고, 그 물을 머금고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흙이 있었다. 쌀, 보리, 밀, 배추, 고추, 무, 고구마, 감자 등 먹을거리들이 물과 흙의 연결·순환 고리 속에서 나왔다.

 

도시화로 그 고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이에 맞추어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공간도 생명 잉태의 신비로움을 목격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자꾸만 만들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순환하지 않는 일방의 회색도시 건설은 멈출 줄 모른다.

 

한새봉 소가 더 이상 되새김질을 할 수 없게 되는 날. 소 이야기, 샘 이야기, 개구리 이야기들은 모두 사라지고 덩그러니 인간만 남게 된다. 그 세상은 괜찮은 세상일까.

 

‘놀이하는 몸’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한새봉 개구리논’을 소생시키고 있다. 물과 흙의 연결·순환 고리가 끊어지지 않게…….

 

▲ 개구리논에서 생명이 움트고 있다. 사진은 물과 흙의 연결·순환 고리 속에서 겨우내 뿌려놓은 해어리배치 씨앗이 싹튼 모습.